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라비트 왕조 (문단 편집) === 부흥 운동 === [[파일:1067px-Banu_Ghaniya_family_tree_svg.png|width=700]] --모로코판 정씨 왕조 (대만)-- 한편 1126년 무라비트 왕조의 아미르 알리 이븐 유수프는 아들 무함마드에게 발레아레스 제도의 통치를 맡겼다. 무함마드[* 1146년 무라비트 왕조로부터의 독립을 선포]의 아들 이샤크는 카르모나의 왈리 직을 맡고 있었는데 무라비트의 패권이 무너지던 1145년, 마요르카로 돌아왔다. 그리곤 1155년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부친 무함마드와 형 압둘라를 죽이고, 정권을 장악하였다. 그의 치세에 발레아레스 제도는 무역과 해적질로 번영하였고 섬들은 엄청난 부와 포로들, 그리고 알 안달루스의 난민[* 종교적으로 엄격한 무와히드 왕조의 지배를 피해 많은 기독교도와 유대인뿐만 아니라 무슬림들 역시 섞여 있었다]들로 붐볐다. 이샤크는 본인이 직접 약탈에 동참하기도 했는데, 일례로 1178년 그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[[툴롱]]을 점령하고, 마르세유 남작을 포함한 많은 포로들을 잡아왔다. 동시에 그는 이탈리아 해상 세력들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. 피사 공화국과는 세 차례 (1171, 1173, 1174년)에 걸쳐, 제노바 공화국과는 1181년, 그리고 루카 공화국과는 차남 알리의 치세인 1184년 6월 1일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. 제노바, 루카와의 조약을 통해 마요르카는 그들과 불가침, 그리고 표류자 보호 및 반환 등을 합의하였다. 이탈리아인들은 마디나 마유르카 (현재의 팔마)에 교회를 지을 수 있었다. 다만 전제 정치로 불만을 샀던 이샤크는 해군 제독 이븐 마이문이 무와히드 왕조측에 망명하는 등 왕권이 불안해지자 무와히드 칼리파 [[유수프 1세]]와 협상하였고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탈물의 일부를 그에게 보냈다. 한편 협상이 완료되기 전에 기독교도 포로들이 궁전을 장악하고 그를 죽였다. (1183년) 폭동은 진압되었고 이샤크의 여섯 아들인 '''무함마드, 알리, 탈하, 타슈핀, 압둘라, 야흐야''' 중 처음엔 무함마드가 계승하였다. 역시 왕권이 불안정했던 그는 무와히드 왕조에 복속하였다. 따라서 아불 하산 알리 이븐 레베르테르[* 기독교도로서 무라비트 군대를 이끌던 용병대장 레베르테르 (바르셀로나 남작의 아들)의 아들. 1147년 마라케시가 함락되자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무와히드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]가 이끄는 무와히드 함대가 진주하였는데 이듬해인 1184년 민중 봉기가 일어나 아불 하산이 사로잡히고 반무와히드 강경파인 알리가 아미르로 추대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